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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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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산투어 댓글 0건 조회 4,477회 작성일 19-01-11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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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과 투르크 그리고 터어키 

 

               김상욱(유라시아고려인연구소장, 한인일보 발행인)

 

 

 우리는  지난호( ‘카자흐스탄에서 보는 유라시아 역사’ -7)까지 기원전부터 대략 기원후 5세기 정도까지 유라시아 초원을 무대로 흥망성쇠를 거듭한 유목민들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즉, 최초의 초원의 제국을 건설한 스키타이 유목민부터 사르마트 그리고 중국을 괴롭히다가 서진하여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흉노(훈)까지를 훑어본 것이다. 이들은 전업유목민으로서 ‘정착농경민’ 들이나 그들의 ‘생산물’을 주로 ‘약탈’이라는 방법으로 획득하면서 유목을 하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춘한 중앙 유라시아 지역을 무대로 인류문명의 한 축을 이루어 왔다. 

 이번 호 부터는 중앙 유라시아 유목민의 대명사이자 20세기 초까지 오스만제국이라는 대제국을 건설했고 지금은 ‘터어키’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불리는 이들의 선조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겠다.

돌궐의 기원

기원후 6세기 무렵, 북방 유목민들은 몽골고원과 서쪽의 카스피해  연안까지 세력을 확장시키며 성장하였다. 이들은 중국 사서에 ‘철륵’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철륵은 투르크의 한자 표기이다. 한편 이와 비슷한 시기부터 돌궐이라는 유목국가의 이름도 등장한다. 돌궐도 투르크의  한자 표기로 생각되지만 철륵이 투르크계 유목민의 총칭임에 반하여 돌궐은 원래 철륵에 속해 있던 것으로 보이는 아사나씨가 중심이 되어 건설한 나라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서> ‘이역전’ 돌궐조는 아사나씨의 기원에 대해 약간 다른 두가지 설화를 소개하고 있다. 두 설화는 모두 어떤 남자와 암늑대사이에 태어난 열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 아사나씨의 조상으로 되어 있다. 성별은 다르지만 부모가운데 한쪽이 늑대라는 점은 몽골고원을 한때 차지했던 ‘고차’의 조상설화와 같다. 또 <수서> ‘북적전’ 돌궐조에 의하면 아사나씨는 유연에 복속되어 금산(알타이산맥) 부근에서 야금일을 담당했다고 한다.

  돌궐은 당시 중앙유라시아에서 일종의 화폐 구실을 했던 비단을 입수하는 수단을 확보하고 나아가 이를 서방에 파는데 능숙한 소그드인과의 접촉이 시작됨에 따라 돌권의 서방진출은 촉진된다. 이렇게 하여 돌궐의 판도는 몽골고원에서 카스피해 북쪽연안까지 미쳤다.

무한은 대카간으로 몽골고원 중앙부의 외튀켄이라 불리는 성지에 본거지를 두고 명목상 그의 휘하인 여러명의 카간과 함께 정복활동을 수행했다. 이런 정복활동으로 인해 비잔틴사료, 아랍사료에 돌궐 카간의 이름이 올라가게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돌궐인들은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에 비단을 팔려 했지만 사산조는 중개 무역의 이익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여 그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자 돌궐은 568년 소그드인을 비잔틴궁정에 사절로 파견하여 중국에서 입수한 비단을 직접 파는데 성공했다. 그 사절은 카스피해 북쪽 과 흑해를 경유하여 비잔틴에 도착했다. 이는 이른바 실크로드의 초원로가 외교와 교역의 통로로 이용된 하나의 사례이다.  이 길은 후에 징기스칸 의 손자 바투가 모스크바와 동유럽을 침략할 때 사용된 루트이기도 하다.

그러나 돌궐은 580년 알타이산맥부근을 경계로 하여 동, 서로 나누어졌다. 중국 수나라의 분열책과 대카간 계승분쟁을 이용한 중국 수나라의 분열책 등이 겹쳐 동 서 돌궐은 다시 통합되지 못하게 된다.

당의 기미 지배

이후 중국에는  당나라가 들어서고 당은 북방 유목민을 ‘기미’지배방식으로 다루었다. ‘기’는 말의 고삐를 , ‘미’는 소의 고삐를 뜻한다. 따라서 기미 지배는 마치 말이나 소를 붙잡아 매두고 조종하는 것 같은 지배 방식을 가리킨다. 이 시기 당나라 수도 장안을 방문한 북방유목민의 지도자들은 당 태종에게 천 카간(투르크어로 텡그리 카간)이라는 칭호를 헌상했는데 이는 카간의 지배를 명분으로 당의  지배를 수용했던 것이다. 이는 17세기 몽골인들이 청나라 황제를 칸으로 부르며 그들의 지배를 수용한 것과 같다. 이때 몽골의 왕공들은 청의 홍타이지(태종)가 만주인, 몽골인, 한인의 추대를 받아 대청 황제에 즉위했다고 인정했던 것이다.  

이와 똑 같은 일이 우리가 사는 카자흐스탄에서도 일어났다. 18세기 카자흐인들이 같은 유목민족인 중가르인들인 청의 압박으로 지금의 카자흐스탄 영토로 밀려들어오자 생존의 위협을 느낀 카자흐인들은 러시아의 짜르를 차간 칸(白王)이라 부르며 그들의 지배를 수용한 것과 같다.

반면 유라시아 초원지대 서부 에서는 훈이 모습을 감춘 뒤에도 동쪽에서 다양한 기마 유목민이 밀려왔다. 그들의 지도자들은 북아시아의 유목 군주가 사용하는 칸을 칭하고 고유명사와 관직명도 투르크-몽골어풍이었다. 그러나 종족 계통을 보면 이란계나 위구르계도 섞여 있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비잔틴은 568년 이후 수차례에 걸쳐 돌궐과 직접 교섭했다.  이때 돌궐은 비잔틴 측이 자기들이 격파하여 도주한 아바르와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를 학자들은 과거 돌궐이 몽골고원에서 격파한 최대의 적이 유연이라는 점을 근거로 아바르를 유연과 동족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경유 유연, 즉 몽골 초원에서 있었던 유연을 ‘진정한 아비르’, 유럽을 침략한 아바르를 ‘가짜 아바르’라 부르기도 한다.

정리하면, 중앙유라시아에 살던 유목민들은 이웃 부족과의 전쟁에서 패하면 승자에 흡수되던가 아니면, 서쪽으로 이동(도주)하던가, 중국에 포함되는 3가지 유형을 보였다. 비잔틴 사료에 등장하는 아바르, 불가르, 하자르도 동방에서 이주(패배해서 서쪽으로 도주)해 온 투르크계 유목민이었다.  특히, 일부 학자들이 ‘대 불가리아’라고 부르는 불가르는 자신들도 역시  동쪽에서 새로 이주해온 유목민인 하자르의 습격을 받고 붕괴된다. 흉노(훈) 이후에도 중앙유라시아의 초원에서 패배한 부족들은 서쪽으로 도주하는 역사는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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