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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문명 짓밟은 '정복자' 티무르 사마르칸트를 '세계문명의 중심'으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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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천산투어 댓글 0건 조회 3,926회 작성일 19-01-11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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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교수(서울대동양사학과)

 

 

촌락에이슬람최대도시인‘카이로’‘바그다드’이름붙이고

‘비비하늠’모스크거대한건축물건설, 이슬람최고문화도시로

 

북쪽의우즈베크, 서쪽의이란‘사바피’에밀려동남쪽으로

후예바부르, 인도정복하고무굴제국창건고도의문명이어가

 

 

  ‘칭기즈칸’이라는이름에비해‘티무르’라는이름은널리알려져있는같지않다. 하지만티무르가정복을위해보낸시간과다녔던지역을보면칭기즈칸의패업(覇業)오히려빛을잃을정도이다. 사실칭기즈칸은생애의대부분을몽골초원의통일로보냈고, 그가참가했던대외원정은군데, 서하•금나라•호레즘뿐이었다. 그러나 1336년에출생한티무르는 1369중앙아시아의유목부족들을통합하는성공한, 1405년에중국을치러가다가사망할때까지거의 40년을유라시아사방각지를원정하고정복하는몰두했다. 칭기즈칸이‘세계정복’의문을열었고실제로그것을완수한것은그의후손들이었다면, 티무르는자신의일대에서‘세계정복’의과업이끝나버렸고그의후손들은가만히앉아서과실을향유했을뿐이었다.

  스페인의카스티유국왕이파견한클라비호(Clavijo)라는사신이 1412사마르칸트를방문하여티무르를만났다. 그리고그의보고를통해서티무르의진면목이유럽에널리알려지게되었지만, 사실티무르의이름은이미전부터유럽에서도공포의대상이었다. 왜냐하면그들을떨게했던동방의군주들이모두앞에서무릎을꿇었기때문이었다. 러시아를지배하던몽골계킵착칸국의군주톡타미시(Toqtamish)원래티무르의지원으로권좌에올랐지만칸이뒤에티무르와서로대립하게되었다. 그러자티무르는 1391볼가강가에서벌어진전투에서그를격파하고킵착칸국의수도였던사라이(Saray)폐허로만들었다. 러시아의많은역사학자들은러시아가‘타타르의멍에’를벗어던진것이러시아인들의애국적투쟁‘키에프인들의피’때문이었다고해석하지만, 사실은티무르의원정으로인해킵착칸국이결정적타격을받았기때문이라고보는것이정확할것이다. 뿐만아니라티무르는서구를위협하던하나의대국을강타했다. 1402오스만제국의술탄바야지드 1세가이끄는군대를앙카라부근에서격파한것이다. 전투에서바야지드는포로가되고결국 1적국에서사망하고말았다.

  유럽에서티무르의명성을한마디로말해주는것이 1587~1588년에영국의작가말로(Christopher Marlowe)‘탬벌레인(Tamburlaine)’이라는희곡이다. 줄거리는주인공탬벌레인이페르시아제국과터키와아프리카를정복하고, 마침내자신이신보다위대하다고외치며‘꾸란’을불태우는데, 오히려그것이그의저주가되어다음해에사망하고만다는것이다. 희곡은인간의무한한가능성을강조하던당시영국의지적분위기와부합하는것이며, 그런의미에서‘세계정복자’티무르는아주적합한주인공이라고있다. 바로‘탬벌레인’이라는이름은페르시아어로‘티무리(Timur-i lang), ‘절름발이티무르’라는말을부정확하게옮긴것이다. 그가젊었을한쪽다리에화살을맞아근육이수축되어다리를절었기때문에그런별명이붙여진것이다. 1941학자들이사마르칸트에있는티무르의무덤구리미르(Gur-i Mir)열어서그의시신을조사했다. 특히게라시모프(M. M. Gerasimov)라는소련학자는티무르의해골을근거로그의얼굴을복원했으며생전에절름발이였다는사실까지확인했다. 그런데티무르의무덤에대해서는옛날부터전해져오던전설이있었다. 그것은누구라도티무르의무덤을열면나라에파멸이닥치리라는것인데, 정말그의무덤이개봉된사흘뒤에독일의소련침공이시작되었다고한다.

  이처럼칭기즈칸을무색케정도였던희대의정복자티무르도자기마음대로없었던것이하나있었다. 그것은자기스스로를‘칸(khan)’이라고부를없었던것이다. 칭기즈칸의몽골제국이등장한이래그의후손이아니면누구도‘칸’을칭할없다는것은이미유라시아지역에통용되는불문율이되었기때문이다. 따라서티무르조차도칭기즈칸의후손가운데하나를허수아비칸으로내세우고, 자신은칭기즈칸일족의여자와혼인한‘구레겐(g?regen), 부마(駙馬)라는칭호로만족해야했다.

  티무르의최종목표는몽골세계제국을자신의힘으로재건하는것이었다. 그러나당시몽골제국은이미분열되고약화되어옛날과같은영광은오래전에없어지고말았다. 그가유라시아각지를원정했던까닭도바로사라진제국의영광을부활시키려는궁극적인목적에서추진된것이었다. 따라서그가몽골제국의본부가있었던중국을자신의최종목표로삼은것도당연한일이었다.

  1405그는총동원령을내려군대를소집하고드디어중국원정을시작하였다. 당시중국은명나라의영락제(1402~1424)통치하고있었다. 물론영락제는몽골에대한 5차례친정(親征), 환관정화의인도양원정등으로중국사에서도보기드문공격적인군주였지만, 집권초기의상황은상당히불안했었다. 쿠데타를일으켜조카였던건문제를시해하고즉위했기때문에그의집권에대해내부의불만이가득한상태였다. 이런처지의영락제가수십동안원정을통해서단련된티무르의기마군단을막아냈으리라고장담하기는어렵다. 그런데군대를이끌고북상하던티무르가시르다리아강가에위치한오트라르(Otrar)라는변경도시에서갑자기사망하고말았고, 이로써중국은끔찍한참화를면하게것이다.

  티무르의정복전은엄청난파괴와살육을수반했다. 도시는페허로변해버리고높은미나렛(이슬람사원의첨탑)있었던곳에는수만명의해골로이루어진탑이쌓였다. 파괴의정도는칭기즈칸시대를능가하는것이었기때문에어떤학자들은그를문명의‘도살자(butcher)’라고부르기까지한다. 그러나그가파괴만것은아니었다. 그는건설자이기도했다. 특히그가수도로삼은사마르칸트는세계각지에서끌어모은기술자들과재물로화려하게장식되기시작했다. 말로의희곡에나오는다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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